우리고장이야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 개혁에 힘쓴 윤현진 선생

우리밀맘마2017.08.15 09:41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으로 활동한 우산 윤현진 선생

 

제가 살고 있는 경남 양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우산 윤현진(18921921) 선생님이 있습니다.

 

윤현진 선생님은 18929월 동래 부윤을 지낸 윤필은과 김안이의 24녀 중 차남으로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내전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지역의 또 다른 독립지사인 이규홍 선생님의 대석리와 바로 이웃해 있는 동네입니다.

 

우산 선생님은 15살 때인 1907년 숙부 윤상은이 창설한 부산 구포의 사립 구명학교를 졸업(1)하고, 17세 되던 1909년에 중국의 남경·북경·상해 등지를 순회하면서 국제정세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1914년 대학을 중퇴하여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에 부산에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를 경영하였고,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많은 독립투사와 교분을 맺었습니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자리를 떨쳐버리고, 그해 321일 상해로 망명, 같은 해 4월 안창호·이시영·이동휘·노백린·김구·김규식·여운형·신익희·이동녕 등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임시정부 의정원과 초대 재무차장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고향의 사재 30만 원을 헌납하였고, 임정의 내분을 수습하는 등 수많은 어려운 문제 해결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1920년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발기인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벽에 부딪혀 임시정부를 개혁하고 운동노선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1921년 5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국민대표대회기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한 위에서의 개혁을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과로로 병을 얻어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하고 1921917(음력 816) 순국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의를 엄수한 뒤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했습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56월 대전국립묘지에 봉환 안장됐습니다.


선생님이 요절하자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라는 제목하에 그의 죽음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했을 정도로 임시정부에서 선생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양산시는 윤현진 선생님의 선양사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윤 선생에 대한 학술연구용역에 이어 흉상 건립과 만화제작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학술연구용역 결과 윤선생님의 활동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윤 선생님은 국내 최초로 농민소비조합인 '양산소비조합'을 설립 운영해 농촌경제 부흥과 일본 상품 배척을 통한 민족사상을 고취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파리장서가 된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사실도 찾아내었습니다.



 

시는 최근 윤 선생의 흉상 건립을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5000만 원을 들여 오는 11월 말까지 2.4m 높이의 청동으로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흉상은 윤 선생이 임정 재무차장으로 활동할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당시의 얼굴과 양복 입은 모습을 참고해 인물상과 복식을 재현하여, 교동 춘추공원 내 윤 선생 기념비 옆에 설치된다고 합니다. 윤 선생님의 기념비는 1959년 양산 군민의 이름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지난 해 발족한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의 기념비가 있는 교동 춘추공원 내에 '독립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시는 4억 원을 들여 춘추공원 진·출입로 개선 등 정비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또한 1600만 원을 투입해 선생의 유년시절과 임정 활약상, 고향 양산에서의 항일운동 등이 담긴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만화를 제작하여 지역 내 학교와 도서관 등에 배포해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양산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지원으로 중국 상해임시정부를 순례하며 윤 선생의 당시 활약상을 조망하는 행사와 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개최할 계획이며, 향후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등도 검토하고 있다 합니다.

 

 

 

by 우리밀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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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기억해야 할 인물, 양산의 독립운동가 이규홍 선생

우리밀맘마2017.08.14 21:41

광복절에 기억해야 할 인물 경남 양산의 독립운동가 백농 이규홍 선생

 

제가 사는 경남 양산에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훌륭한 애국지사가 두 분이 있습니다. 우산(右山) 윤현진(1892~1921) 선생님과 백농(白農) 이규홍(李圭洪, 1893~1939) 선생님입니다


우산 윤현진 선생님은 양산시 차원에서 선양 사업이 본격 추진되고 있지만, 이규홍 선생님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에서 제외되어 지역사회의 관심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규홍이규홍선생


백농 이규홍 선생님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주요한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이규홍 선생님은 경남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생님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습니다. 1916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17년 부산부 대창정 2정목 18번지 백산상회 건너편 일광상회(一光商會)라는 위장 무역업을 경영하며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이후 19193월 삼일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1919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경상도 선출의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산하 청년단 출판부장, 임시정부 내부차장, 학무차장, 재무총장, 외무총장, 의정원 부의장, 국무원, 임시헌법개정 위원, 새약헌기초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 활동 와중에 병을 얻어 1927년 말 귀국해 고향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1939520일 향년 47세의 일기로 상북면 대석리 자택에서 타계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각료들이 찍은 사진에도 이규홍 선생의 모습이 있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에도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분이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한 것은 명약관화한데도 국가로부터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규홍 선생의 유족과 종친회에서는 국가보훈처에 수차례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보류 결정 통지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해방 전 귀국했을 때부터의 행적이 분명치 못하며, 변절의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훈처는 이 선생의 포상 제외 사유로 1920년대 상해임시정부에서의 독립운동은 인정되지만 1930년 이후 사망 시까지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특히 이 선생이 귀국해 양산에서 가촌토지 주식회사 사장과 환영자동차 회사 무한책임사원으로 근무한 기록이 있다며 친일·변절 의혹도 제기했다. 그리고 아무리 환자지만 임시정부에서 각료를 지냈던 분이 귀국했는데 일제가 그냥 치료받도록 놔뒀을 리는 없고, 바로 체포해서 옥에 가뒀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전향(轉向)했거나 변절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변절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유족들은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본 외무성 까지 수소문하며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이규홍 선생이 일본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등록돼 편지내용까지 검열되고 있었으며, 이후 변절이나 투항을 한 기록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훈당국은 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촌토지주택회사 등 두 회사 대표로 조부 이름이 명기된 것은 당시 이 회사를 설립해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동생과 아들이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해 형식상 요건을 갖추기 위해 부득이 그렇게 한 것이며, 당시 선생님은 중병으로 투병 생활 중이어서 회사를 설립하거나 운영할 처지가 못 됐다는 것도 증명하였습니다. 더구나 선생은 이들 회사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후손들은 선생님이 귀국한 뒤 1930년대 이후의 행적을 당시 마을 주민과 관련자 증언, 비자금을 상해 임정 첩보원에게 전달한 당사자 증언, 사진, 독립운동 관련 사료 등으로 확인여 제출했지만 보훈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경우이규홍선생의 손자 이경우씨


 

이규홍 선생의 손자 이경우 씨는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수십년 동안 노력했지만 국가에서는 아직까지 인정을 해주지 않고 있다. 엄연히 독립운동사에 나와 있고, 변절한 기록도 없고, 친일명단에도 없는 분이 왜 독립유공자로 인정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형님이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돌아가시고, 나 또한 생업에 종사하며 백방으로 뛰어 다니고 있지만 이젠 너무 힘이 든다. 마지막으로 행정소송이라도 제기할 계획인 만큼 지역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며 안타까운 심정을 지역 언론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by 우리밀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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