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콩달콩우리가족

무섭고도 짜릿하며 신기 상큼한 우리가족 태몽이야기

우리밀맘마2017.08.15 13:07

울 아들 방학숙제를 해야한다며 저를 부르네요.

"엄마, 숙제가 우리가족 태몽이야기를 적어야 되는데, 가르쳐 주세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낳으며 꾼 태몽을 차례대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할수록 재밌네요. 또 시간이 그리 오래되었는데도 어제 일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울 아이들의 태몽이야기를 한번 써볼까 합니다.

먼저 첫째입니다. 

잘생긴 누런 진돗개가 저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까? 몸집이 산만한 커다란 진돗개가 다가오니 제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옆에 있는 방망이로 저리 가라고 계속 때렸습니다. 그러면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갈만도 한데, 이 진돗개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무서워지데요. 그래서 더 심하게 계속해서 그 진돗개를 때리다 잠에서 깼답니다.

근대 울 큰 딸, 지금 성격으로 봐서는 맞고만 있을 애가 아닌데요. 

제가 그리 얘기 하니, 듣고 있던 큰 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그 진돗개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세요?"

"뭐."

"태어나면 두고 보자."

"ㅎㅎㅎ"




울 둘째의 태몽은 제가 꾸지 못하고, 작은 언니가 대신 꿨습니다. 
아주 커다란 조개가 있더랍니다. 그 조개가 갑자기 "떡" 하고 열리더니, 그 안에 고추 달린 남자 아기가 있었답니다. 언니가 얘기를 해줄 때 이러더군요.

" 고추가 달렸으니, 아들이겠지. 그런데 조개가 좀 맘에 걸린다."

ㅎㅎ 울 둘째, 뱃속에서 그리 심하게 발길질을 해서 아들인가 했는데, 태어나 보니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때는 완전 아들이었습니다. 딸인 것을 표내고 싶어, 이쁜 치마에 분홍색 토끼 머리띠까지 해줬는데도 "아이고 그놈 잘 생겼다"라고 하던지, 심하면 "그 녀석 장군감일세"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환골탈태, 엄청난 미인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는 자기 태몽이야기만 하면 "아니야, 아니야~." 하고 울었었는데, 이젠 도리어 지가 맞장구를 쳐가며 재밌다고 깔깔댑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태몽을 정말 많이 꾸었습니다. 
아마 10번쯤은 꿨던 것 같네요. 아마 위로 딸 둘이 있어 이제는 아들이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그 중에는 호랑이 꿈 2개, 강아지 꿈 2개, 개미1개, 물고기1개...좀 징그러운 태몽도 있었는데, 아들을 놀린다고 그 얘기를 하면 "이 엄마~정말 싫어" 하며 불쾌해 합니다. 

이전에 호랑이 꿈은 이야기했으니 (관련글 ->   호랑이띠 해에 호랑이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은 사연강아지꿈 이야기를 들려 드릴께요.

아주 귀엽고 작은 발바리가 저를 따라 오더군요. 저는 무서워 막 달렸습니다. 그러자 계속 저를 따라 달려오는데, 어찌나 빠른지요. 낭떠러지에다 밀어버렸는데 그래도 잘만 기어 올라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저는 어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았는데, 들어오려고 밖에서 문을 막 흔들어 대더군요. 그러다 잠을 깼습니다.



또 한번은 개미굼을 꾸었습니다. 개미가 수억마리는 있어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개미가 모여서 모양을 만드는데, 커다란 집모양을 이루는 것입니다. 
정말 신기하더군요.

마지막 막내 차례입니다. 
한 원두막에 있는데,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비사이로 과수원이 보이고 사과나무에 사과가 정말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려 있더군요. 사과가 먹고 싶어 정말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하나 땄습니다. 그리고 그 사과를 먹으려는 순간, 이게 웬일입니까? 맛있어 보이던 사과가 누우런 호박으로 변한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던 막내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엄마, 그면 난 사과야, 호박이야?"

"글쎄~ ㅎㅎㅎ"





우리 가족의 태몽 이야기 어떠셨나요? 
한번씩 이렇게 아이들과 태몽이야기를 하니 그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재밌어 하구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것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좋겠죠.

(이글은 2017.8.15에 수정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by 우리밀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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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엄마

치매 아내 살해한 남편 왜 그랬는가 사연을 들어보니

우리밀맘마2017.08.15 12:13

치매 아내 살해한 남편, 분노를 참을 수 없게 하는 치매환자의 행동



너무 안타까운 사연이 있더군요. 

치매 증세를 보이는 아내를 2년간 지극정성으로 돌보다, 순간 화를 참지 못해 아내를 살해한 79세 남편에게 재판 국민참여재판은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 12부(김용관 부장판사)는 25일(2013.1) 지난해(2012) 10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아파트에서 자신을 때리며 폭언을 하는 부인 조모씨의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살인)로 구속 기소된 이모(79)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습니다.

재판부는 "인간에게 생명의 가치는 가장 중대하고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라며 "치매로 인한 가족 내 범죄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유사 범죄 재발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령인 피고인이 자백했고 2년 가까이 피해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병시중하다 모욕을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범행한 점, 전과가 없는 점 등을 참작해 형을 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2년간이나 집에서 부양한 분이라면 성품이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중증 치매는 아니지만 치매증세를 앓고 있는 친정 엄마를 집에서 모셔봤는데, 정말 너무 힘들더군요.



기사를 보니 살인을 저지른 그 분, 모범적인 삶을 살면서 가족들을 부양했고, 헌신적으로 아내를 병간호하다, 1년 전쯤부터 의부증세가 심해진 아내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고는 피해자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고 합니다. 


당시 자신을 때리며 '바람피운 것 안다' '부모 없이 막 자란 놈' 등 폭언을 하는 부인 조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고, 범행 후 자살하려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아들에게 발견돼 제지당했다고 하네요.


올해(2017) 7월에 유사한 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 https://goo.gl/42MZdW )

치매를 앓던 80대 아내를 구타하여 살인한 남편에게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선고한 이유는 


"피고인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벅찼을 나날들을 오롯이 홀로 견뎌왔다"며 "치매로 인해 정상적인 사리판단이 어려운 상태에서 피해자와 말다툼을 했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고 하였습니다. 



치매환자_지참물치매환자가 항상 갖고 다녀야 할 물건들입니다.


위 그림이 있는 사이트에 치매 환자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옆 링크를 클릭해보세요. ->치매환자 돌보는 법



사람이 치매를 앓게 되면 일단 기억이 가까운 시간의 것부터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뇌세포가 그렇게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방금 밥을 먹고도 밥 먹은 것을 잊어버리고 또 밥을 먹겠다고 하구요. 이런 것이 반복되다보면 몸도 그렇게 잊어버리는지 방금 밥을 먹었는데도 배고픔을 느낀다고 하네요. 그래서 종종 치매 부모를 모시는 집에 며느리들이 방문하면 그 어머니는 며느리가 밥도 안준다고 욕하는 소리를 듣게 되고, 딸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올케를 타박하다 가족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을 곧 잊어버리기 때문에 거짓말도 아주 능수능란하게 합니다. 

방금 한 행동은 잊어버리고,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죠. 방금 돈을 받아놓고는 왜 지난번에 빌려간 거 안주냐고 그러죠. 그리고 그 기억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되기도 합니다. 


희안하게 욕을 또 잘합니다. 

예전에 그렇게 자애로운 분이었는데, 치매에 걸리면 갑자기 어디서 들으셨는지 그 욕들을 쏟아내거든요.

제가 함께 살면서 제 엄마를 관찰해보니 치매에 걸리게 되면 정신연령이 2살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시기의 아기들은 엄마의 관심이 오직 자기에게만 향해주길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눈길이 떨어졌다 싶으면 울고 떼쓰며, 엄마의 관심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치매환자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죠. 만일 부양인의 관심이 소홀해진다고 생각되면 사고를 칩니다. 집을 나가기도 하고, 억지를 쓰기도하고, 폭언을 퍼붓거나, 폭력적인 행동도 하구요. 그 때의 표정을 보면 “맛 좀 봐라” 이런 식이죠.



하여간 같이 사는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듯이 행동합니다. 


아내를 살해하신 그 분, 부양하는 2년동안 정말 미치고 환장하는 일 엄청나게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부양하셨다면 두 분 사이가 함께 사시는 50년 동안 아주 좋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가 치매로 인해 순간순간 자신을 폭발시키듯이 괴롭게 하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며, 차마 자녀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들도 하구요, 그런 모습을 계속해서 보며 살아가다 보면 아마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동병상련이랄까요? 치매와 파킨슨 병으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오던 울 엄마, 작년 저희와 살다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시며 가출하셨다가 광주에서 겨우 찾았습니다. 그 다음 날 또 다시 가출하셔서 도저히 안되어 오빠가 엄마를 맡기로 했습니다. 


저희와는 4개월을 함께 살았죠. 그리고 오빠 집에서 그래도 1년을 지내다가 지난 주에 또 가출병이 도졌습니다. 우리 오빠 맞벌이 부부거든요. 딸 둘이 대학에 다니고 있고, 두 부부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참 사는게 빠듯합니다. 엄마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상황도 아니구요. 다른 형제들 역시 엄마를 부양할 처지도 아니고..

남편이 정 안되면 우리 집에서 다시 모셔보자고 하는데 솔직히 저도 좀 겁이 납니다. 울 부부 역시 맞벌이니 엄마 혼자 낮에 집에 있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가 없잖아요. 


요양병원에 모실까 생각도 했지만 울 엄마 치매 빼고는 건강하시기에 병원에서 과연 계실려고 할지 그것도 의문이구요. 정말 막막합니다. 


좋은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악플은 사절합니다. 

예전에도 개념 없는 악플 한 줄 정말 오랫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더군요.    

치매걸린 엄마와 살아가기,오빠가 일년을 함께 살다 포기한 이유

치매 엄마 모시고 살다보니 절감하는 치매환자에게 꼭 필요한 시설
가출한 치매걸린 엄마 극적으로 다시 찾은 사연
가슴 섬뜩하게 하는 치매걸린 엄마의 엽기적인 행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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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이야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 개혁에 힘쓴 윤현진 선생

우리밀맘마2017.08.15 09:41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으로 활동한 우산 윤현진 선생

 

제가 살고 있는 경남 양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우산 윤현진(18921921) 선생님이 있습니다.

 

윤현진 선생님은 18929월 동래 부윤을 지낸 윤필은과 김안이의 24녀 중 차남으로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내전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지역의 또 다른 독립지사인 이규홍 선생님의 대석리와 바로 이웃해 있는 동네입니다.

 

우산 선생님은 15살 때인 1907년 숙부 윤상은이 창설한 부산 구포의 사립 구명학교를 졸업(1)하고, 17세 되던 1909년에 중국의 남경·북경·상해 등지를 순회하면서 국제정세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1914년 대학을 중퇴하여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에 부산에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를 경영하였고,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많은 독립투사와 교분을 맺었습니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자리를 떨쳐버리고, 그해 321일 상해로 망명, 같은 해 4월 안창호·이시영·이동휘·노백린·김구·김규식·여운형·신익희·이동녕 등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임시정부 의정원과 초대 재무차장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고향의 사재 30만 원을 헌납하였고, 임정의 내분을 수습하는 등 수많은 어려운 문제 해결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1920년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발기인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벽에 부딪혀 임시정부를 개혁하고 운동노선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1921년 5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국민대표대회기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한 위에서의 개혁을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과로로 병을 얻어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하고 1921917(음력 816) 순국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의를 엄수한 뒤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했습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56월 대전국립묘지에 봉환 안장됐습니다.


선생님이 요절하자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라는 제목하에 그의 죽음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했을 정도로 임시정부에서 선생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양산시는 윤현진 선생님의 선양사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윤 선생에 대한 학술연구용역에 이어 흉상 건립과 만화제작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학술연구용역 결과 윤선생님의 활동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윤 선생님은 국내 최초로 농민소비조합인 '양산소비조합'을 설립 운영해 농촌경제 부흥과 일본 상품 배척을 통한 민족사상을 고취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파리장서가 된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사실도 찾아내었습니다.



 

시는 최근 윤 선생의 흉상 건립을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5000만 원을 들여 오는 11월 말까지 2.4m 높이의 청동으로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흉상은 윤 선생이 임정 재무차장으로 활동할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당시의 얼굴과 양복 입은 모습을 참고해 인물상과 복식을 재현하여, 교동 춘추공원 내 윤 선생 기념비 옆에 설치된다고 합니다. 윤 선생님의 기념비는 1959년 양산 군민의 이름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지난 해 발족한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의 기념비가 있는 교동 춘추공원 내에 '독립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시는 4억 원을 들여 춘추공원 진·출입로 개선 등 정비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또한 1600만 원을 투입해 선생의 유년시절과 임정 활약상, 고향 양산에서의 항일운동 등이 담긴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만화를 제작하여 지역 내 학교와 도서관 등에 배포해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양산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지원으로 중국 상해임시정부를 순례하며 윤 선생의 당시 활약상을 조망하는 행사와 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개최할 계획이며, 향후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등도 검토하고 있다 합니다.

 

 

 

by 우리밀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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