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어원, 노들강변은 노량진의 옛말


우리밀파파의 우리말 배우기 



우리 민요 중 "노들강변"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먼저 가사를 보면 

1.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매여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잊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2.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국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워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3.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이 곡은 신불출이라는 분이 작사한 노래인데, 국민 가요라 할만큼 인기가 많았던 신(新)민요였습니다. 당시 우리 신민요 5개 대표곡은 아리랑, 도라지, 천안삼거리, 양산도, 노들강변을 꼽았다고 하네요. 이 노들강변은 특히 초등학교에선 무용시간에 단골메뉴로 레코드를 틀어놓고 학생들을 지도했다고 하구요, 저도 어릴 때 이 장단에 맞춰 운동회 때 춤췄던 기억이 납니다. 

버들강변

능수버들 우거진 경복궁



이곡을 작사한 신불출(본명 신상학 ;1907-1969) 필명 불면귀(연극에서만 사용)이란 분은 서울에서 태어나 개성에 이주하였고, 보통학교를 마친 후 서울로 가서 소년노동을 하면서 야간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1920년대 말엽에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수업을 하는 과정에 ‘넌센스’라는 장르를 달고 콜롬비아 레코드에 ‘아첨 끝에 봉변’, ‘대머리타령’을 취입하였습니다. 귀국 후 1930년에 문호월과 함께 노량진 나루를 건너며, ‘노들강변’의 가사를 썼다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참 친숙한 이 노래, 그런데 노래를 부를 때 `노들강변`이라고 하면 버드나무가 휘휘 늘어진 그런 강변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도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라고 되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진 듯 합니다. 그래서 `노들`이 `버들`을 연상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어느 곳이든 이러한 풍경이 있는 강변이면 `노들강변`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노들강변`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싸우시던 `울돌목`은 한자어로 `명량(울명, 돌량)`이라고 하지요. 이 `명량`의 `명`은 `울명`자이고요. `량`은 원래 `돌량`입니다. 이 `돌`은 충청도 방언에 `똘, 또랑`으로도 사용하고 있지요. `노량`의 `량`도 `돌량`입니다. 그래서 `노량(이슬노, 돌량)`은 `노돌`이라고 했지요. 그러던 것이 `노들`로 변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노량`이 `노들`로 변하고 거기에 `강변`이 덧붙은 것입니다. 즉 `노들강변`은 서울의 `노량진` 나루터를 말합니다. 현재 서울의 흑석동에 있는 국립묘지 근처에 있던 나루터를 말합니다.

 이 `노들강변`은 옛날에 서울과 남쪽 지방을 잇는 중요한 나루였습니다. 그래서 이 `노들강변`은 애환이 많이 깃든 곳입니다. 노량진1동의 현위치는 한강철교와 수산물 시장간 강변일대와 그 남·서쪽지역으로는 대방동, 동쪽으로는 상도동과 북쪽으로는 한강과 인접해 강 건너 용산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노량진동의 동명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옛부터 이곳은 수양버들이 울창하였습니다. 노들나루라고 불리는 도선장으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으로 노량진하면 노량津을 연상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죠. 특히 상류의 한강진 하류와 양화진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한강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므로 군대가 주둔하는 진을 설치하였다 합니다. 옛날이곳은 서울과 과천땅의 경계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노량진에서 석별의 술잔을 나누고 서울출입의 감회를 읊기도 하였다합니다.

 




by 우리밀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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