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조상들은 결혼 전에 궁합을 보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궁합에 의존하여 상대를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연애 결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 시대에도 강수(强首)같은 철저하고도 모범적인 연애 결혼이 있었다. 신라의 여성들은 매년 봄 꽃필 무렵이면 청산 계곡 맑은 물가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길쌈 대회가 끝나면 여성들인데도 음주와 놀이가 뒤따랐다. 귀족 사회에서는 여성들은 승마하는 풍속도 있었으며 이별할 때는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라의 여성들의 생활은 자유스러웠다. 따라서 남녀간의 관계 역시 자유 연애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나눈 경우가 많았다.


남녀 두사람이 정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정을 통하고 결혼을 하는 경우를 삼국사기에서는 야합이라고 기록하였다. 유교 윤리가 뿌리 내리기 전이니 만큼 야합은 별로 죄악시되지 않았다. 야합의 예로는 김유신(595-673)의 부모 서현과 만명 부인, 김유신의 누이동생과 김춘추(무열왕, 재위 654-661), 강수와 그의 아내와의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조 시대에 와서는 연애 결혼이란 말조차 없었고 대부분 부모의 상식과 교양에 의하여 장본인의 의견은 무시 당한 채 결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회가 가부장제인데다가 엄부시하의 대가족주의 환경 속에서 시부모의 부양과 자식 생산 즉 왕인정식속(旺人丁食粟)을 가능하게 할 규수라야 신랑 측에서는 결혼하기를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결정에 의한 결혼이긴 하였으나 현대 결혼보다 신선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선도 보지 못한 신랑 신부가 상대를 처음 보는데서 오는 스릴이 있을 것이고 결혼 초야를 맞이하여 두 사람 사이에 연애가 시작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없다. 



성씨가 같은 동성(同姓) 결혼에 대해서는 신라 사람은 김 · 박 양성이 많았는데 이성과는 혼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성을 피하지 않고 혈족 사이에도 혼인을 하였다. 하지만 다시금 이조 시대에 들어오면서 유교 정치가 국시 였으니 동성금혼은 물론이고 이성의 친척까지도 통혼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고금에 없었던 미속으로 현대에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져왔다.


 

 또한 유소년기의 가정 환경을 중요시 여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영육합일의 결혼식을 중요시 여기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영육합일의 결혼은 정신적 결합은 물론 육체의 결합까지를 말하며 서로가 책임 있는 마음으로 몸도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처녀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옛날이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문제시되는 일이 많다. 이것은 가치 평가의 기준인 것이다. 단지 성감에 흥분하여 자기가 보존해야 하는 가치관을 상실한다면 오점을 남기고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처녀성을 생사를 건 숭고한 가치관에서 존중하였다는 점을 상기하여 볼 필요가 새삼 느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Polygamy(일부다처제)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나라 역시 이조 말엽까지는 일부다처제였다. 엄격히 말하여 일부일처제는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쌍벌제라는 민법 개정이 있는 후부터 시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조 시대에는 처첩 문제를 엄격히 구별되어 있었으나 성생활에 있어서는 첩된자가 오히려 실질적인 쾌락을 누렸다. 정실은 남편의 영달을 한 몸에 지니고 살았으나 밤이면 독수공방에서 마음은 어두웠다. 제도상의 풍습은 정실에게 살림을 그리고 성애에 대한 쾌락을 수청 기생과 첩에게서 보충하는 관례로 젖어 있었다. 


 

by 우리밀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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